내릴 역을 지나쳤어요
장례를 치른 다음 날, 지우는 평소 내리던 역을 지나쳤습니다. 잊지 않으면서도 오늘을 건널 길은 아직 고르지 못했습니다.
할머니의 장례 뒤 첫 출근길, 지우는 평소 내리던 역을 지나치며 기억과 하루 사이에 멈춰 선다.
장례를 치른 다음 날 아침, 지우는 할머니의 빨간 목도리를 가방에 넣은 채 출근한다. 익숙한 역에서 내리지 못한 지우는 자신이 아직 할머니를 놓지 못해서라고 여긴다. 온유 선생은 기억을 지우는 일과 오늘을 이어 가는 일을 나누어 바라보게 하고, 지우 앞에 서로 다른 세 갈래의 작은 길을 보여 준다. 지우는 아직 어느 길도 고르지 않은 채 그 앞에 앉아 있다.
할머니를 기억하며 출근할 때
누군가를 잃은 뒤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은 그 사람을 잊는 일과 다를 수 있어요.
누군가를 잃은 뒤 일상으로 돌아가려던 날, 어떤 순간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?
당장 잊지 않아도 됩니다. 오늘의 길을 한꺼번에 정하지 말고, 마음이 앉을 빈 의자 하나는 남겨둔 채 다음 걸음을 살펴봅시다. 아직 고르지 못한 마음도 잠시 남겨두어도 됩니다.
장면
- 01 · 닫히는 문 앞 01 · 닫히는 문 앞 — 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다음 날이었다. 지우는 늘 내리던 역에서 한 발을 내딛지 못했고,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. 지우: 한 정거장만 더 가도 되겠지.

- 02 · 가방 속 빨간색 02 · 가방 속 빨간색 — 지우는 한 정거장을 지나 빈 벤치에 앉았다. 가방 안에는 할머니가 마지막 겨울까지 두르던 빨간 목도리가 접혀 있었다. 지우: 이걸 안 가져오면, 진짜 안 계신 것 같아서요.

- 03 · 빈 의자 하나 03 · 빈 의자 하나 — 온유 선생은 목도리를 치우지 않은 채, 탁자 옆에 빈 의자 하나를 당겨 놓았다. 지우가 놓고 싶지 않은 것은 목도리가 아니라, 할머니를 기억한 채 하루를 이어 갈 자리인지도 몰랐다. 온유 선생: 잊고 싶은 게 아니라, 기억한 채 출근하고 싶은 거군요. 그 마음이 앉을 자리 하나부터 남겨둬 봅시다. 지우: 그런 자리가 있을까요?

- 04 · 세 갈래의 아침 04 · 세 갈래의 아침 — 종이 세 장에는 서로 다른 아침이 놓였다. 목도리를 가방 안쪽에 넣고 평소 역에서 내리기, 한 정거장 더 가서 천천히 내리기, 회사에 늦는다고 먼저 알리고 오늘은 돌아가기. 온유 선생: 어느 길이든 오늘의 몫만큼입니다. 지금 바로 고르지 않고 여기 잠깐 남겨두어도 됩니다. 지우: 아직은… 못 고르겠어요.
